영화 밀양, 신은 왜 피해자를 건너뛰고 용서했는가?

볕은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2007)은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를 원작으로 삼는다. 남편을 잃은 신애가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으로 내려가고, 그곳에서 감당할 수 없는 상실을 겪은 뒤 신앙에 기대었다가 다시 무너지는 이야기다. 전도연이 이 작품으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감독과 배우 모두 이 작품이 종교 영화가 아니라고 밝혀 왔다. 

영화 밀양


실제로 이 영화가 겨냥하는 것은 특정 종교의 교리가 아니라,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세계에 요구하게 되는 설명 그 자체다. 왜 하필 나인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체계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만약 존재한다면, 그 답은 누구를 위한 답인가. 

용서는 누구의 권리인가? 

가해자가 먼저 평온해질 때 

이 영화에서 가장 널리 회자되는 장면은 신애가 가해자를 만나러 가는 대목이다.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품고 찾아간 자리에서, 그는 상대가 이미 신에게 용서받아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는 말을 듣는다. 신애가 무너지는 이유는 상대가 뉘우치지 않아서가 아니다. 자신이 건네려던 것을 이미 다른 곳에서 받아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용서라는 행위의 구조다. 용서는 피해자에게만 속한 권한이며, 어떤 제3자도 피해자를 대신해 그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 자크 데리다는 용서 가능한 것을 용서하는 일은 용서가 아니라고 말하며, 용서란 본래 불가능한 것을 향해서만 성립한다고 보았다. 그 불가능을 감당할 수 있는 자리는 오직 상처를 입은 당사자뿐이다. 신애가 빼앗긴 것은 아들만이 아니라 용서할 권리였다. 한나 아렌트는 용서를 인간이 가진 특별한 능력으로 보았다. 

인간의 행위는 되돌릴 수 없고 그 결과는 끝없이 번져 나가는데, 용서만이 그 사슬을 끊고 사람을 과거로부터 풀어 준다는 것이다. 다만 아렌트 역시 처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종류의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밀양>이 서 있는 자리가 정확히 거기다. 신애가 용서에 실패한 인물이라기보다, 애초에 인간의 능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감당하라고 요구받은 인물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값싼 은혜라는 오래된 경고 

이 문제는 종교 바깥의 비판이 아니라 종교 내부에서도 오래 다뤄져 왔다.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회개와 책임 없이 주어지는 구원을 값싼 은혜라 부르며 경계했다. 대가 없이 죄가 소거된다면 그것은 용서가 아니라 면제이며, 면제받은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저질렀는지 끝내 이해하지 못한 채로 남는다. 가해자의 평온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의 얼굴에는 죄책감이 없다. 죄를 처리하는 절차가 피해자를 거치지 않고 완결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화해도 피해자의 자리를 건너뛰고 이루어질 수 없다는 원칙은 개인 사이의 일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사회적 참사나 역사적 폭력을 두고 이제 그만 화해하자는 말이 나올 때마다 반복해서 확인해야 할 원칙이 바로 이것이다. 

왜 하필 나인가? 

답이 없는 질문을 끌어안는 방식 

전능하고 선한 존재가 있다면 왜 무고한 고통이 존재하는가. 이 물음은 신정론이라 불리며 수천 년 동안 다뤄졌지만 만족스러운 답에 도달한 적이 없다. 욥기가 지금까지 읽히는 이유도 그 책이 답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답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신애가 신앙에 기댔던 것은 믿음이 깊어서가 아니라 설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무 이유 없이 벌어진 일이라는 결론을 인간은 견디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뜻이 있다는 문장에 매달리고, 그 문장이 무너지는 순간 더 깊은 곳으로 떨어진다. 의미를 부여해 고통을 견디는 방식은 강력하지만, 그 의미가 배신할 때의 낙차 또한 그만큼 크다. 

위로가 폭력이 되는 순간 

주변 사람들은 끊임없이 신애를 위로한다. 그 위로에 악의는 없다. 다만 그들이 건네는 말은 대체로 슬퍼하는 사람을 슬픔에서 빨리 꺼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그 순간 위로는 요구로 바뀐다. 용서하라는 권유, 이제 괜찮아지라는 격려, 뜻이 있을 거라는 해석은 모두 애도의 속도를 타인이 정하는 행위다. 고통을 겪는 사람 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머무는 것이다. 설명을 제공하려는 충동은 대개 고통받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의 불편함에서 나온다. 

숨은 볕은 마당에 있다 

원작 소설은 출구 없는 절망으로 끝난다. 이창동은 영화에 원작에 없던 인물 하나를 추가했다. 종찬은 신애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의 고통을 해석하지도 못한다. 그저 곁에 있고, 필요할 때 손을 보태고, 거절당해도 다시 나타난다. 이 인물의 존재가 이 작품의 결론이다. 밀양이라는 지명은 숨은 볕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영화가 마지막에 비추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마당 한구석의 볕이다. 구원이 위에서 내려오는 설명의 형태로 오지 않는다면, 남는 것은 옆에서 함께 있는 사람의 형태뿐이다. 고통의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이유를 모르는 채로 곁에 남는 일은 인간이 할 수 있으며, 이 영화가 끝까지 붙드는 것은 그 가능성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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