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정말 몰랐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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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진술이 아니라 질문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2004)는 1988년 도쿄에서 실제로 벌어진 아동 방치 사건을 모티브로 삼는다. 어머니가 약간의 돈과 짧은 편지를 남기고 집을 떠난 뒤, 열두 살 장남 아키라와 세 동생이 아파트 한 칸에서 스스로 살아가는 이야기다. 아키라를 연기한 야기라 유야는 이 작품으로 칸영화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 영화의 제목을 사실의 진술로 읽으면 절반만 이해한 것이 된다. 아이들의 존재를 눈치챈 사람은 여럿이었다. 집주인도, 편의점 직원도, 같은 건물의 이웃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제목이 던지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질문이다. 여러 사람이 조금씩 알고 있었는데도 왜 최종적으로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되었는가.  몰랐다는 말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알면서 모르는 상태  사회학자 스탠리 코언은 사람들이 불편한 진실을 다루는 방식을 부인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했다. 그는 부인이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사실은 인정하되 그것이 심각한 일은 아니라고 해석을 바꾸는 형태가 있고, 심각성까지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나설 일은 아니라고 결론짓는 형태가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대부분 두 번째와 세 번째 유형에 속한다. 아이들끼리 있는 것은 알지만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안쓰럽다고 여기면서도 남의 가정사에 끼어드는 일은 곤란하다고 판단한다. 각자의 판단은 저마다 합리적이며 어느 한 사람도 특별히 냉정하지 않다. 그런데도 그 합리적인 판단들이 모이면 완벽한 무지가 완성된다. 몰랐다는 말은 사실의 보고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나누어 만든 결과물이다. 편의점 직원들이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건네는 장면은 이 문제를 압축해 보여 준다.  그 호의는 분명한 선의이지만, 동시에 상황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역할도 한다. 최소한의 도움이 주어지는 한 사태는 위기로 인식되지...

영화 밀양, 신은 왜 피해자를 건너뛰고 용서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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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은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2007)은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를 원작으로 삼는다. 남편을 잃은 신애가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으로 내려가고, 그곳에서 감당할 수 없는 상실을 겪은 뒤 신앙에 기대었다가 다시 무너지는 이야기다. 전도연이 이 작품으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감독과 배우 모두 이 작품이 종교 영화가 아니라고 밝혀 왔다.  실제로 이 영화가 겨냥하는 것은 특정 종교의 교리가 아니라,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세계에 요구하게 되는 설명 그 자체다. 왜 하필 나인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체계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만약 존재한다면, 그 답은 누구를 위한 답인가.  용서는 누구의 권리인가?  가해자가 먼저 평온해질 때  이 영화에서 가장 널리 회자되는 장면은 신애가 가해자를 만나러 가는 대목이다. 용서하겠다는 결심을 품고 찾아간 자리에서, 그는 상대가 이미 신에게 용서받아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는 말을 듣는다. 신애가 무너지는 이유는 상대가 뉘우치지 않아서가 아니다. 자신이 건네려던 것을 이미 다른 곳에서 받아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용서라는 행위의 구조다. 용서는 피해자에게만 속한 권한이며, 어떤 제3자도 피해자를 대신해 그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 자크 데리다는 용서 가능한 것을 용서하는 일은 용서가 아니라고 말하며, 용서란 본래 불가능한 것을 향해서만 성립한다고 보았다. 그 불가능을 감당할 수 있는 자리는 오직 상처를 입은 당사자뿐이다. 신애가 빼앗긴 것은 아들만이 아니라 용서할 권리였다. 한나 아렌트는 용서를 인간이 가진 특별한 능력으로 보았다.  인간의 행위는 되돌릴 수 없고 그 결과는 끝없이 번져 나가는데, 용서만이 그 사슬을 끊고 사람을 과거로부터 풀어 준다는 것이다. 다만 아렌트 역시 처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종류의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

영화 도희야, 보호와 소유는 어디에서 갈라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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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내미는 일에도 자격이 필요한가?  정주리 감독의 장편 데뷔작 <도희야>(2014)는 바닷가 마을 파출소로 좌천된 경찰 영남이 학대당하는 열네 살 도희를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구도만 보면 익숙한 이야기다. 어른이 아이를 구하고, 가해자는 처벌받고, 관객은 안도한다. 이 영화는 그 익숙한 경로로 가지 않는다.  도움을 주려 한 사람이 오히려 궁지에 몰리고, 도움을 받은 아이는 순수한 피해자의 자리에 얌전히 머물지 않는다. 여기서 던져지는 질문은 학대가 왜 벌어지는가가 아니다. 왜 우리 사회는 누군가를 돕는 일을 이토록 위험한 행위로 만들어 두었는가이다.  완벽한 피해자만 구조된다  이상적 피해자라는 좁은 문  범죄학자 닐스 크리스티는 사회가 피해자를 인정하는 데 암묵적 조건을 요구한다고 지적하며 이상적 피해자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약하고, 잘못이 없고, 저항하지 않으며,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어야 비로소 도움받을 자격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 조건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사람들은 곧바로 태도를 바꾼다. 정말 피해자가 맞느냐는 의심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도희는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상황을 계산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상황을 조작할 줄 안다. 관객이 이 아이 앞에서 불편해지는 지점이 정확히 여기다. 그러나 불편함의 원인을 다시 살펴야 한다.  학대 환경에서 오래 살아남은 아이가 어른의 감정을 읽고 이용하는 기술을 갖추는 것은 타락이 아니라 적응이다. 도희의 계산은 그가 지금까지 어떤 조건에서 생존해 왔는지를 알려 주는 증거에 가깝다.  순수하지 않은 피해자에게도 보호는 필요하다  여기서 이 작품이 던지는 도전이 분명해진다. 우리는 대체로 피해자를 도우려는 것이 아니라 도울 만한 피해자를 찾으려 한다. 사연이 깨끗하고 서사가 단순한 대상 앞에서만 연민이 작동하며, 대상이 복잡해지는 순간 연민은 판단으로 바뀐다. 문제는 실제 피해가 결코...

영화 무산일기, 인정받지 못한 사람은 무엇을 포기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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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세 자리가 사람보다 먼저 읽힐 때  박정범 감독이 연출과 주연을 겸한 <무산일기>는 남한에 정착한 탈북 청년 승철의 일상을 따라간다. 그는 벽보를 붙이는 일로 생계를 잇고, 교회에서 만난 여자를 마음에 두고, 길에서 만난 흰 개를 돌본다. 이 인물은 감독의 실제 친구를 모델로 삼았으며, 그 친구는 영화가 완성되기 전 세상을 떠났다. 작품의 출발점이 된 감독의 단편 제목은 세 자리 숫자와 이름을 나란히 붙인 것이었다.  당시 탈북민의 주민등록번호에 붙던 식별 번호다. 서류상으로는 분명히 국민이 되었는데, 바로 그 서류가 그를 다른 사람으로 표시한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여기서 출발한다. 사람은 어떤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는가. 그리고 그 인정을 끝내 얻지 못한 사람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인정은 세 방향에서 온다  자격은 주어졌으나 자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철학자 헤겔은 인간이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를 통해 비로소 자기의식을 갖게 된다고 보았다. 이 통찰을 현대 사회이론으로 확장한 악셀 호네트는 인정이 세 층위에서 이루어진다고 정리했다. 가까운 관계에서 받는 정서적 승인, 사회 구성원으로서 보장받는 법적 권리, 그리고 자신의 능력과 존재가 공동체에 쓸모 있다고 평가받는 사회적 가치 부여다. 승철은 두 번째 층위에 해당하는 법적 지위를 확보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이유는 나머지 두 층위가 완전히 비어 있기 때문이다. 권리를 얻는 것과 자리를 얻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며, 제도가 문을 열어 주더라도 사람들이 옆자리를 내주지 않으면 그는 여전히 밖에 서 있게 된다. 이주민이나 소수자를 둘러싼 논의가 법적 지위 확보에서 멈추면 안 되는 이유도 이와 같다.  무시의 세 가지 얼굴  호네트는 인정의 반대편에 놓인 무시 역시 세 형태로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신체를 함부로 다루는 폭력, 권리에서 배제하는 차별, 그리고 존재의 ...

영화 똥파리, 폭력은 어떻게 다음 세대로 건너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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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미워하던 얼굴을 닮아 가는 일  양익준 감독이 연출과 주연을 겸한 <똥파리>(2009)의 주인공 상훈은 용역 깡패로 살아간다. 그는 아버지의 폭력 아래에서 자랐고, 그 아버지를 누구보다 격렬하게 미워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아버지가 하던 일을 그대로 반복한다. 이 모순이 이 영화의 출발점이자 끝이다.   폭력을 다룬 영화는 흔하지만, 이 작품이 다른 지점은 폭력을 사건이 아니라 언어로 그린다는 데 있다. 상훈이 쓰는 유일한 어휘는 욕설이며, 그가 아는 유일한 접촉 방식은 주먹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던져야 할 질문은 왜 저 사람이 폭력적인가가 아니다. 왜 저 사람에게는 폭력 말고 다른 언어가 남아 있지 않은가이다.  학습된 것은 폭력만이 아니다  두려워하던 대상을 자기 안에 들이는 일  정신분석에서는 견딜 수 없는 폭력 앞에 놓인 아이가 가해자의 태도와 논리를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살아남는다고 설명한다. 공격자와의 동일시라 불리는 이 기제는 비겁함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다. 맞는 쪽에 서 있는 한 세계는 통제 불가능하지만, 때리는 쪽의 문법을 익히면 최소한 예측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상훈은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아버지의 방식을 정확히 물려받았다.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가 밝힌 대로 인간은 보상과 처벌만이 아니라 관찰과 모방으로도 행동을 익히며, 아이에게 가장 오래 노출되는 모델은 대개 가정 안에 있다. 상훈이 아버지처럼 되지 않으려 애쓸수록 아버지처럼 되어 가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가 배운 유일한 관계의 형식이 그것뿐이었다.  폭력은 결국 자기를 향한다  아버지를 향한 태도가 증오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죽이겠다고 소리치던 사람이 정작 아버지가 위태로워지자 그를 업고 병원으로 달린다. 학대의 기억을 가진 사람이 가해자와 완...

영화 남매의 여름밤, 상실은 어떻게 일상에 스며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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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없는데도 무언가는 계속 지나간다  윤단비 감독의 장편 데뷔작 <남매의 여름밤>은 2019년 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어 이듬해 극장에 걸렸다. 고등학생 옥주와 동생 동주가 아버지를 따라 할아버지의 낡은 2층 양옥집으로 옮겨 가고, 얼마 뒤 고모까지 합류해 한여름을 함께 보낸다. 요약하면 이것이 전부다.   이 영화에는 극적인 사건이 거의 없다. 밥을 먹고, 마당의 식물에 물을 주고, 사소한 일로 다투고, 각자의 방으로 흩어진다. 그런데도 영화가 끝날 무렵 관객은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지나갔음을 알게 된다. 이 작품이 다루는 주제는 특정한 상실 그 자체가 아니라, 상실이 사건의 형태가 아니라 시간의 형태로 도착한다는 사실이다.  집이 기억을 대신 보관한다  낡은 양옥집이 사실상 주인공인 이유  카메라는 인물보다 공간을 자주 오래 응시한다. 계단, 마루, 마당, 여닫히는 문. 가스통 바슐라르는 집이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기억이 자리를 잡고 보관되는 구조물이라고 보았다. 사람은 시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장소를 기억하며, 어떤 시절을 떠올릴 때 실제로 떠오르는 것은 그 시절을 담고 있던 방의 모양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가 집을 화면 가운데 두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인물들은 각자 자기 감정을 설명하지 않지만,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남는다. 할아버지의 부재가 실감되는 순간이 대화가 아니라 텅 빈 공간을 통해 전해지는 것도 같은 원리다. 감정을 말로 옮기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공간은 유일한 증언자가 된다.  여름방학이라는 유예된 시간  이 가족이 이 집에 머무는 것은 방학 동안만으로 합의된 임시 상태다. 앙리 베르그송은 인간이 실제로 겪는 시간이 시계 눈금처럼 균질하게 흐르지 않으며, 겪는 밀도에 따라 두께가 달라지는 지속이라고 설명했다.  방학은 정확히 그런 시간이다. 앞뒤의 삶에서 잘려 나온 채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안에서 ...

영화 파수꾼, 언어를 갖지 못한 소년들의 관계와 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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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보다 먼저 도착한 것은 침묵이었다  윤성현 감독의 데뷔작 <파수꾼>(2011)은 한 고등학생의 죽음에서 출발한다. 아들에게 무심했던 아버지가 뒤늦게 아들의 시간을 되짚기 시작하고, 사진 속에 남은 두 친구를 찾아가면서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형식은 미스터리에 가깝지만 이 영화가 추적하는 것은 사건의 범인이 아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아버지가 얻어내는 대답의 성질이다. 아무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설명할 의지도 없어 보인다. 한 사람은 회피하고 한 사람은 사라졌다. 진실이 은폐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말로 정리된 적이 없었다는 편이 정확하다. 이 영화의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사람은 왜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가장 말을 하지 못하는가.  서열 외에는 관계를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애정의 언어가 없을 때 남는 것 기태와 동윤과 희준의 관계는 언뜻 견고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 오가는 말은 대부분 농담과 욕설과 힘겨루기다. 좋아한다거나 서운하다는 감정을 직접 발화하는 장면은 사실상 없다. 감정을 표현할 어휘가 주어지지 않은 집단에서 친밀함은 다른 형식을 빌려 표현될 수밖에 없고, 그 형식이 대개 위계다. 누가 더 위에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식으로만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이 구조에서 장난과 폭력의 경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행동이 어느 날은 우정의 증거였다가 다음 날은 모욕이 되며, 어느 쪽인지 판정할 기준은 서열의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쥔다. 남성 집단에서 오래 관찰되어 온 이 문법은 청소년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회식 자리의 짓궂은 농담이나 조직 안의 텃세 역시 애정과 지배를 구분하지 못하는 같은 언어의 성인 판본이다.  잃을까 두려운 사람이 먼저 상처를 낸다  기태는 관계를 잃는 데 대한 공포가 유난히 큰 인물로 그려진다. 아버지와 둘뿐인 집에서 그가 소속을 확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가 친구들이었다는 점을 영화는 반복해 암시한다.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