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리들, 아이들의 세계에서 배제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금 하나로 안과 밖이 갈리는 세계 

윤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우리들>(2016)은 피구로 시작해 피구로 끝난다. 편을 가르고,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고, 금 하나를 두고 안에 남을지 밖으로 나갈지가 결정되는 놀이. 초등학교 4학년 선의 세계는 이 구조를 그대로 닮아 있다.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이유로 이 영화를 성장담의 범주에 넣는 것은 지나치게 안전한 독법이다. 

여기서 벌어지는 일은 어른 사회의 축소판이 아니라 그 원형에 가깝다. 예의와 제도와 사회적 언어라는 완충장치가 아직 씌워지지 않았기에, 배제와 결속의 메커니즘이 가장 벌거벗은 형태로 드러날 뿐이다.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언제 우리가 되는가. 그리고 그 우리는 무엇을 대가로 성립하는가. 

영화 우리들 광고 포스터


우리라는 말은 누구를 밖에 두어야 완성되는가?

결속의 조건은 공동의 배제 대상이다 

보라를 중심으로 한 무리는 특별히 잔인한 아이들이 아니다. 이들은 그저 집단이 유지되는 가장 흔한 방식을 따르고 있다. 르네 지라르는 공동체가 내부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한 사람을 지목해 밖으로 밀어내는 구조를 반복해 왔다고 보았다. 배제의 대상이 특정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밀어낼 대상이 필요했기 때문에 지목된다는 것이 이 메커니즘의 핵심이다. 

 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영화는 끝내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이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설명이다. 이유가 있어서 배제된 것이 아니라 배제가 먼저 있고 이유는 나중에 만들어진다. 한 무리가 하나로 묶이기 위해 반드시 누군가를 바깥에 세워야 한다면, 그 자리에 누가 서게 되는지는 거의 우연에 가깝다. 후반부에서 그 자리가 다른 아이에게 옮겨 가는 장면은 이 구조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조용히 증명한다. 

나눈 비밀은 언젠가 급소가 된다 

두 아이가 그토록 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쪽은 형편이 넉넉지 않은 집에서 어린 동생을 돌보고, 다른 한쪽은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으나 부모의 자리가 비어 있다. 결핍의 종류가 다른 두 사람이 서로의 빈자리를 알아본 것이 이 우정의 출발점이었다. 

문제는 교실이라는 공간이 그 결핍을 곧바로 서열의 재료로 환산한다는 데 있다. 무엇을 가졌는지가 어디에 설지를 결정하는 질서 안에서, 서로의 약점을 아는 사이라는 조건은 우정의 근거에서 위험의 근거로 순식간에 뒤집힌다. 선과 지아가 여름 내내 쌓은 친밀함은 서로의 비밀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게오르크 짐멜은 비밀의 공유가 관계를 특별하게 묶는 동시에 그 관계를 가장 취약하게 만든다고 분석했다. 

나만 아는 것을 너에게 건네는 순간, 나는 너에게 나를 무너뜨릴 도구를 함께 넘긴 셈이 된다. 두 아이가 서로를 향해 퍼붓는 폭로가 정확히 급소에 꽂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 말들은 미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랑했던 시간에서 나왔다. 가장 아프게 찌를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며, 이것은 열 살의 교실에서든 마흔의 사무실에서든 달라지지 않는다. 

되갚는 일에는 끝이 없다 

회로를 끊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질문이다 

친구와 때리고 맞기를 반복하는 동생 윤은 왜 되갚지 않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그럼 언제 놀아?" 응보의 정당성을 따지는 대신 시간의 문제로 되돌리는 이 질문 앞에서 어른의 논리는 무력해진다. 맞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공정하다는 감각은 우리 안에 깊이 박혀 있다. 

다만 응보가 완결되는 순간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되갚음은 언제나 상대에게 새로운 되갚을 이유를 남기기 때문이다. 윤의 질문은 정의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회로 안에 머무는 동안 관계에 쓸 시간이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할 뿐이다. 

어른이 되어도 교실은 끝나지 않는다 

이 영화가 오래 회자되는 이유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건드려서가 아니다. 직장의 점심 자리, 온라인 커뮤니티, 어떤 모임의 단체 대화방에서 우리는 여전히 같은 놀이를 한다. 누군가를 은근히 빼놓음으로써 남은 사람들의 소속감을 확인하는 방식은 나이가 든다고 사라지지 않으며, 다만 더 정교하게 위장될 뿐이다. 선이 겪은 일을 낯설게 느끼는 사람은 아마 그 놀이에서 한 번도 밖에 서 본 적이 없는 쪽에 가깝다. 

지워지다 만 봉숭아 물처럼 

여름의 끝, 손톱에 남은 봉숭아 물은 완전히 지워지지도 선명하게 남지도 않는다. 관계가 남기는 흔적의 성질이 대개 그렇다. 화해했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하고 끝났다고 말하기에는 남아 있는 상태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견딘다. 마지막 피구 장면에서 선은 지아가 금을 밟지 않았다고 말한다. 용서의 선언도 화해의 약속도 아닌, 사실 하나를 바로잡는 짧은 문장이다. 

그러나 배제의 회로를 끊는 일은 대체로 이런 크기로 시작된다. 대단한 결심이 아니라, 밖으로 밀려나는 사람 옆에서 아니라고 말하는 한 사람의 목소리. <우리들>이 남기는 것은 감동이 아니라 그 목소리를 낼 수 있겠느냐는 조용한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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